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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24 [다큐멘터리] 구한말 호남의병 항쟁
정치시사2017. 12. 2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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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조선을 독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을 하자, 일본은 이에 굴복하였다. 국제 정세를 주시하던 민씨 정권도 친러 정책으로 기울었다. 일본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비상 수단을 써서 명성황후를 죽이고 친일 정권을 내세워 중단된 개혁(을미개혁)을 실시했다.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고 근대적 우편 사무를 실시했으며, 1895년 11월 15일을 기해 단발령을 내렸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고, 일제 침략자를 타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제천의 유인석과 춘천의 이소응, 여주의 박준영 등에 의해 의병이 시작되었다. 나라의 국모가 왜적들에게 시해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풍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려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백성의 분노가 물끓듯하였다. 배달 겨레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는 일이었기에 최익현같은 이는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특히 유인석의 제천 의병은 충주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한말 의병의 기본 정신은 위정척사 사상으로서 그 주창자는 기정진과 이항로였다. 이들은 나라를 내집같이 지키고 임금을 어버이처럼 여겨 국모의 시해와 단발령에 반기를 들었다. 

  동학혁명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이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하나는 장성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의병이고 다른 하나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아전들의 의병이었다. 장성 의병은 기우만을 중심으로 기정진의 문인들인 기삼연, 정의림, 고광순, 김익중 등이 앞장섰다. 기우만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원수를 갚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임금을 모셔오자고 호소했다. 기우만은 2월에 장성부의 향교에 들어가 뜻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나주로 달려갔다. 그는 나주 관찰부 참서관 안종수를 죽이고, 불안해하는 나주 의병을 격려했다.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은 광주 향교에 본부를 두어 기삼연을 선봉장으로 삼았는데, 그가 거느린 장성 의병은 300여 명으로 기세를 떨쳤다. 여기에 해남군수 정석진과 담양군수 민종렬이 합세하여 전라도 13개 고을을 휩쓸었다. 

  그런데 친위대 중대장 이겸제가 진주 의병을 진압하고 전라도에 들어와 해남군수 정석진을 죽이고 담양군수 민종렬을 체포하여 의병을 위협했다. 또 남로선유사 신기선은 기우만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종용하였다. 이때 기삼연은 의병의 해산 종용은 임금의 뜻이 아니며 여기에서 군대를 해산하면 모두 화를 당한다고 반대했으나, 기우만은 군대를 해산하고 말았다. 

  호남의 초기 의병은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움 한 번 갖지 못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으로 엄청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된 지 1년여 만에 다시 봉기하여 민족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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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구한말 호남의병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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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주평화뉴스_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