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2018. 8. 3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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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마음을 발견하고 이것으로 천하의 군주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전쟁과 경쟁과 이익이 지배하는 세상을 인의(仁義)와 도덕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정치를 통해 세상을 구한다'는 그의 강렬한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상주의자라는 비판만 받았다. 그가 고단한 유세 길에서 돌아와 말년에 제자들과 함께 쓴 책이 『맹자』이다. 독백 또는 제자들과의 대화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이 가진 풍부하고 다양한 가치만큼이나 주석서와 연구서도 매우 많다. 그러나 『맹자』를 읽으면 공통적으로 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고 정치와 사회와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선 맹자가 정치로 세상을 구제하려 한 배경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중국 인문주의의 계승이다. 신정(神政) 일치의 정치 전통은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주나라에 이르러 급속하게 인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시경』과 『서경』 등은 이 시기 권력 변동의 정치적 정당화 논리를 담아내고 있다. 이 책들은 신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정치를 보았다. 예를 들면 인간이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제사에 정성을 드리지 않아 천명이 바뀌었다고 한다(서경의 태서 중) 춘추시대에 이르면 사람의 힘 특히 군사력으로 예법과 종실을 지키는 것이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명분마저 내려 놓고 오직 부국강병만이 정치적 안정과 국가적 통일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회가 사유의 중심으로 등장할 때 맹자는 사람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중국 인문주의를 한 차원 높였다. 둘째는 공자에 대한 사랑이다. 공자는 인문주의 전통을 성숙시킨 위대한 스승이었다. 책을 편찬하고 제자를 길러 내고 지식을 보편화했다. 수많은 정치적 개념들을 일상의 문제로 설명함으로써 사(士)나 서인(庶人)들도 정치가 무엇인지 알게 하였다. 예를 들면 군자(君子)라는 개념은 통치를 담당한 군주의 자제라는 뜻이었는데 공자는 거기에 인의와 도덕을 실천하는 참된 정치가라는 새로운 관념을 더했다. 공자는 주나라 초 문왕과 무왕의 예법을 회복함으로써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해치는 처참한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덕치(德治)를 주장하였다.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14년 동안이나 천하의 군주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등 정치를 통한 구세(求世)의 열정에 가득 찬 인생을 살았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 공부했다. 맹자는 공자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했다. 그는 "민(民)이 생긴 이래 공자와 같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말한다. 셋째는 시대 풍조에 대한 반발이다. 맹자가 태어난 서기전 372년 무렵 중국은 전쟁이 없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거의 모든 군주는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삼고 법가적 이념에 맞추어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도덕이나 예법, 문왕과 무왕의 도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고 오직 경쟁에서의 승리와 이익만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맹자와 비슷한 연배인 상앙(商鞅)은 호적법, 관리의 등급제, 강한 형벌 등을 창안하여 진(秦)나라를 일약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힘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위엄을 낳으며, 위엄은 덕을 낳는다. 따라서 덕은 힘에서 생긴다'라고 말한다. 군주들의 이해타산에 영합하여 부강의 계책을 헌상하는 사람들이 제자백가 대부분의 실체이다. 눈앞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인의도덕은 실적주의 앞에 꼼짝을 못하였고 인문학은 크게 쇠퇴하였다. 극단적 공리주의자 묵적(墨翟)과 극단적 이기주의자 양주(楊朱)의 말이 천하에 가득했다. 맹자는 이들 모두를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으로 간주했다. ☆ 인동초TV [티스토리 블로그] http://indongcho.tistory.com/ ☆ 맹자(孟子), 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 '왕도정치' 맹자(孟子), 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 '왕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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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주평화뉴스_대표기자
정치시사2018. 6. 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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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마음을 발견하고 이것으로 천하의 군주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전쟁과 경쟁과 이익이 지배하는 세상을 인의(仁義)와 도덕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정치를 통해 세상을 구한다'는 그의 강렬한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상주의자라는 비판만 받았다. 그가 고단한 유세 길에서 돌아와 말년에 제자들과 함께 쓴 책이 『맹자』이다. 독백 또는 제자들과의 대화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이 가진 풍부하고 다양한 가치만큼이나 주석서와 연구서도 매우 많다. 그러나 『맹자』를 읽으면 공통적으로 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고 정치와 사회와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선 맹자가 정치로 세상을 구제하려 한 배경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는 중국 인문주의의 계승이다. 신정(神政) 일치의 정치 전통은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한 주나라에 이르러 급속하게 인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시경』과 『서경』 등은 이 시기 권력 변동의 정치적 정당화 논리를 담아내고 있다. 이 책들은 신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정치를 보았다. 예를 들면 인간이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제사에 정성을 드리지 않아 천명이 바뀌었다고 한다(서경의 태서 중) 춘추시대에 이르면 사람의 힘 특히 군사력으로 예법과 종실을 지키는 것이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명분마저 내려 놓고 오직 부국강병만이 정치적 안정과 국가적 통일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회가 사유의 중심으로 등장할 때 맹자는 사람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려고 노력함으로써 중국 인문주의를 한 차원 높였다. 둘째는 공자에 대한 사랑이다. 공자는 인문주의 전통을 성숙시킨 위대한 스승이었다. 책을 편찬하고 제자를 길러 내고 지식을 보편화했다. 수많은 정치적 개념들을 일상의 문제로 설명함으로써 사(士)나 서인(庶人)들도 정치가 무엇인지 알게 하였다. 예를 들면 군자(君子)라는 개념은 통치를 담당한 군주의 자제라는 뜻이었는데 공자는 거기에 인의와 도덕을 실천하는 참된 정치가라는 새로운 관념을 더했다. 공자는 주나라 초 문왕과 무왕의 예법을 회복함으로써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해치는 처참한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덕치(德治)를 주장하였다.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14년 동안이나 천하의 군주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등 정치를 통한 구세(求世)의 열정에 가득 찬 인생을 살았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에게 공부했다. 맹자는 공자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했다. 그는 "민(民)이 생긴 이래 공자와 같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말한다. 셋째는 시대 풍조에 대한 반발이다. 맹자가 태어난 서기전 372년 무렵 중국은 전쟁이 없는 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거의 모든 군주는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삼고 법가적 이념에 맞추어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도덕이나 예법, 문왕과 무왕의 도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고 오직 경쟁에서의 승리와 이익만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맹자와 비슷한 연배인 상앙(商鞅)은 호적법, 관리의 등급제, 강한 형벌 등을 창안하여 진(秦)나라를 일약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힘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위엄을 낳으며, 위엄은 덕을 낳는다. 따라서 덕은 힘에서 생긴다'라고 말한다. 군주들의 이해타산에 영합하여 부강의 계책을 헌상하는 사람들이 제자백가 대부분의 실체이다. 눈앞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인의도덕은 실적주의 앞에 꼼짝을 못하였고 인문학은 크게 쇠퇴하였다. 극단적 공리주의자 묵적(墨翟)과 극단적 이기주의자 양주(楊朱)의 말이 천하에 가득했다. 맹자는 이들 모두를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으로 간주했다. ☆ 인동초TV [티스토리 블로그] http://indongcho.tistory.com/ ☆ 맹자(孟子), 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 '왕도정치' 맹자(孟子), 도덕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 '왕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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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주평화뉴스_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