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11년 전 못 다 이룬 꿈'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7.25 정동영 11년 전 못 다 이룬 꿈, 2018년 다시 시작합시다!
정치시사2018. 7. 25. 16:04
반응형






[인동초TV] 유튜브 정치시사 채널, 민주평화당과 정동영 지지채널


정동영 11년 전 못 다 이룬 꿈, 2018년 다시 시작합시다!

경제양극화 해소하고 남북통일, 서민가정 지킴이가 되겠습니다.




페이스북트위터공유스크랩프린트크게 작게

“기자 출신의 개성공단 주역”

"양복 상의 안주머니엔 늘 두 개의 수첩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얘기를 듣고, 또 하나는 아이디어를 적는 수첩입니다. 대통령은 먼저 좋은 청취자(Good Listener)여야 합니다. 이제는 존 F. 케네디 처럼 기자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차례입니다".(9월6일 연합뉴스 인터뷰).


15일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정동영(鄭東泳) 후보는 기자 출신의 `대중친화형' 정치인이다.


모진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을 끌어온 `초인형.투사형' 리더십과는 달리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여론의 흐름을 읽어내고 이를 과단성있게 현실정치에 투영해내는 여론중시형 리더십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여론에 귀를 열어놓으면서도 `이거다' 싶으면 물불 안가리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측근 의원)이라는 게 `정치인 정동영'의 강점이자 경쟁력이다.


이 같은 스타일은 방송앵커 출신의 높은 인지도, 대중을 휘어잡는 탁월한 언변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정치인 정동영의 `초고속 성장'을 일궈낸 원동력이 됐다. 1996년 MBC 기자직을 그만두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최연소 최고위원, 열린우리당 의장, 통일부 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 승승장구했고 정치입문 12년만에 범여권 최대정파의 대선후보가 되는 영예까지 안았다.


물론 이 같은 화려한 프로필 이면에는 외롭고 피말리는 정치적 도전과 승부수가 놓여있었다. 과거 민주당 시절 `제왕적 총재' 체제에 맞서 개혁의 기치를 들고 정풍(整風)운동을 전개한 개혁성과 뚝심,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이 몰아친 2002년 민주당 경선을 끝까지 완주한 `경선 지킴이' 행보, 열린우리당 창당과 17대 총선정국을 정면돌파한 `몽골기병'식의 속도감과 과단성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선후보 정동영'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개성(開城) 동영'이란 신조어는 정동영 리더십의 또 다른 정수를 상징한다. 수년째 설계도에만 머물던 개성공단을 직접 `손에 잡히는 현실'로 만들어낸 추진력은 한반도의 미래를 이끌어갈 `평화대통령'으로서의 비전과 능력을 보여주는 확실한 근거라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과거 그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붙던 `이미지 정치'와 `콘텐츠 부족' 논란은 장관직을 통한 `대권수업'과 대선후보 경선과정을 거치며 사실상 불식됐다는 평가다. 통일장관과 NSC 상임위원장을 거치며 업그레이드된 정책전문성과 정보력을 토대로 정 후보는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역할과 시각을 제공했고 이는 경선과정에서 드러난 `평화경제론'이라는 정책 콘텐츠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취약한 여론 지지도와 `참여정부 황태자' 논란, 경선과정의 조직동원 논란은 정 후보에게 드리워진 그늘이다.


◇휴전일 출생..`눈물 젖은 밥' = `귀공자'와 같은 화려한 이미지와는 달리 정 후보는 시련과 굴곡으로 점철된 유년시절을 보냈다.


6.25 전쟁 휴전협정일인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통에 네명의 형이 병사하면서 장남으로 성장했다. 특히 전주고 2학년 재학시절 도의원을 지낸 부친이 갑자기 별세하자 정 후보는 홀어머니와 세명의 동생을 보살피는 가장의 역할을 떠안게 됐다.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한 정 후보는 암담한 시대상황을 견디지 못해 1973년 최초의 유신반대 집회인 서울대 문리대 데모에 참가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듬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3개월간이나 복역한 뒤 출감했고 곧바로 군에 강제징집됐다. 권만학 경희대 교수 등 당시 교류했던 친구들은 그의 정치활동에 중요한 자산으로 남았다.


정 후보가 가장 고달팠다고 회고하는 시기가 군 제대후 복학시절이다. 정 후보는 서울 변두리에서 아동복을 만들어 납품하던 어머니를 돕기 위해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옷장사를 했다. 직접 천과 단추를 사러 다니고 오버로크를 친 천을 둘러메고 청계천과 사근동 언덕길을 오갔다. 정 후보는 당시를 떠올릴 때면 "어머니와 밤새 바지와 치마를 만들고 새벽이면 팔러 나갔다. 눈물에 젖은 밥을 먹었다"고 토로하곤 한다.


고난의 시기였지만 부인 민혜경씨의 대학 기숙사를 찾아가 개나리 한다발을 들고 청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 대학을 졸업한 정 후보는 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1978년 MBC 보도국에 입사한 그는 1996년까지 18년간 기자생활을 지내며 격동의 현대사를 현장에서 체험했다. 기자시절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언론관은 유명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내로 걸어 들어가 빗발치는 총성을 들으며 도청 앞에서 취재를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정 후보가 작성한 뉴스 리포트는 보도되지 못했다가 27년만인 올해 5월 우연히 원본이 발견돼 소개된 바 있다.


1988년 당시 집권당이던 민정당 소속 후보가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에게 돈 봉투를 배달하다가 적발된 사건을 놓고 정 후보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각오로 9시 뉴스 톱뉴스로 보도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입사 첫해 MBC 사보에 `한국의 크롱카이트가 되고 싶다'고 썼던 정 후보는 입사 10년만에 앵커의 꿈을 이뤘고 이 때부터 대중에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정 후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붕괴현장의 참상을 생중계하면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패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갈등하던 그는 결국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결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4월 MBC 9시뉴스 간판앵커 시절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 정치계에 입문한 정 후보는 전주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정치인생의 첫걸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헌정사상 최초로 2회 연속 전국 최다득표의 영광을 안았고 총선 직후에는 40대 기수론의 돌풍을 일으키며 47세의 나이로 집권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정풍운동과 2002년 `경선 지킴이' = 2000년 12월 권노갑 당시 민주당 고문의 2선 퇴진과 당 쇄신론을 골자로 하는 정풍운동은 정 후보가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는 도약대로 작용했다. 정 후보는 당시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도중 김대중 대통령의 면전에서 "국민의 눈엔 권노갑 최고위원이 YS 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며 권 고문의 2선 퇴진을 요구, 정풍운동의 불을 지폈다.


2002년 국민참여경선제를 처음 제안하고 제도를 완성한 주역도 정 후보였다. 2개월 가까운 민주당 경선에서 대다수 후보가 중도포기하는 상황 속에서도 정 후보는 경선을 끝까지 완주하면서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지켜주는 의리를 보여줬다. 정 후보는 이후 자발적 민주당 지지자들로 구성된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돼지저금통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희망돼지 모으기' 운동을 주도했다.


◇`몽골기병론'으로 총선 압승 = 대선 이후 정 후보는 민주당내 개혁그룹을 이끌고 신당 창당을 추진, 2003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열린우리당을 출범시켰다. 전당대회에서 초대 당의장에 당선된 정 후보는 새벽부터 재래시장과 택시기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현장 속으로 파고드는 `몽골기병식'의 역동적 리더십을 발휘했고 이에 힘입어 당 지지율은 불과 두달만에 30%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47석의 초미니 여당에 불과했던 열린우리당이 탄핵정국과 17대 총선을 거쳐 과반이 넘는 152석의 거여(巨與)로 발돋움하면서 정 후보는 명실상부한 여권 유력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정 후보는 2004년 6월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며 `대권수업'을 시작한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의 6.17 단독 면담, 북핵위기를 해결한 9.19 공동성명 타결, 이산가족 화상상봉 시대 개막은 정 후보의 통일부 장관 재직시절 이룬 대표적 성과다. 특히 개성공단 건설은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인동초TV [티스토리 블로그]

http://indongcho.tistory.com/
































반응형
Posted by 민주평화뉴스_대표기자